표준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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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의 두 얼굴
  • 박현주 책임
  • 승인 2018.12.27 05:58
  • 조회수 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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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은 불편한 것이다

나는 제주 사투리로 말하고 너는 서울 표준어로 이야기한다.
일하고 있는 나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너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서울에 있는 나는 점심시간이고 워싱턴에 있는 너는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경험하는 세상과 네가 경험하는 세상은 다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부족 시대에는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기준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 사람이 제주도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다르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뜻이 되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최초로 한 일은 도량형, 화폐, 문자, 바퀴 폭을 통일한 것이었다.
유럽을 통일한 로마는 길, 수도, 하수도의 규격을 통일시켰다.
서로 다른 나라들의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같은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차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시간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1876년 7월, 캐나다 공학자 샌포드 플레밍(Sanford Fleming)은 밴도란이라는 시골역에서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이후, 플레밍은 세계 표준시를 제정하는데 앞장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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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샌포드 플레밍의 일화 (출처: https://minidovecomics.wordpress.com/2013/05/31/sandford-fleming/)

산업사회의 발전은 세계화를 촉진시켰다.
세계화는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 온 사람들이 사용하던 다른 기준을 하나로 만들도록 했다.
표준어, 표준시, 표준 단위 등 표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하르방*은 할아버지가 되고, 한치는 3.03cm가 되었으며, 일각은 15분이 되었다.
* 하르방 :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같으면 편리하다

제품 호환성이 높아진다
휴대전화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새로운 휴대전화를 구매하면 기존에 사용하던 충전기는 버려야했다. 이는 호환성 부족으로 인한 불편함뿐만 아니라 거래비용의 증가, 환경오염이라는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2009년 ‘Micro-USB’ 방식의 충전 단자를 표준으로 선정했고, 이는 2014년 국제 표준으로 선정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도 제조사별로 다양한 충전 단자를 통일하기 위해 20핀 단자를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었지만, 국제표준을 받아들여 ‘Micro-USB’ 방식을 국내 표준으로 선정했다. 이로써 내수용과 수출용을 따로 생산하는 데 들이는 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소비자의 편의가 향상되었다.

생산성이 향상된다
보급형 자동차 생산으로 유명한 헨리 포드는 모델T 자동차 원가를 낮추기 위해 부품과 공정을 표준화했다. 이전에는 작업자 개인의 경험과 기술에 의해 생산품의 품질이 좌우되었다. 포드는 제품의 품질을 상향 평준화시키고 생산속도를 증가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제조공정을 세분화하고 작업 과정을 표준화함으로써 개인적, 주관적인 기술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술로 전환시켰다. 이제 어떠한 작업자라도 일정한 품질을 보장하는 생산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고, 대량생산으로 인해 생산비용 또한 줄어들었다. 이는 포디즘(Fordism)으로 발전하여 제조업체들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선순환구조를 만든다
프린터가 많이 팔리면 프린터 토너도 많이 팔 수 있다. 프린터 별로 사용할 수 있는 프린터 토너의 호환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표준화에 따라 호환성이 보장되면, 제품 판매는 제품에 필요한 소모품의 수요를 높여준다. 이는 네트워크 외부성 효과가 발휘되는 현상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활용한 선순환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하였다. 윈도우 운영체제 시장을 장악함에 따라,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브라우저 시장에서 독점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운영체제 시장에서 윈도우를 디팩토 표준(de facto standard) * 으로 만들었던 것이 성공요인이었다.
* 사실상 표준 : 관습이나 시장 요구에 의해 일반 대중에게 독점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기업간 경쟁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갖는 비공식적 표준

같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독점화를 촉진한다
개인용 컴퓨터의 운영체제는 MicroSoft사의 Windows가 거의 독점하고 있어 사실상 표준으로 인정되고 있다. 리눅스(Linux)라는 오픈 소스 방식의 운영체제도 사용이 편리하고 Windows 보다 더 유용한 기능이 많지만, 많은 사용자들은 Windows를 선택한다. Windows 방식이 이미 익숙해져 버린 데다, 보편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 지배력이 높아질수록 독점화는 가속된다.

기술 발전을 저해한다
표준은 원래 기술발전을 가속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기술력이 낮은 기업이 표준을 적용함으로써 일정 수준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우수한 기술이 반드시 표준으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비디오 기술로 BetaMax 방식과 VHS 방식이 있었다. BetaMax 방식은 소니의 자체 기술이고, VHS방식은 일본의 마쓰시다 등 여러 기업과 미국, 유럽에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BetaMax 방식은 고화질에 잡음 및 화면 노이즈도 적어, VHS 방식에 비해 뛰어난 기술이다. 다수의 기업들이 연합하여 다양한 전략으로 VHS방식을 디팩토 표준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기술력에서 앞선 BetaMax 방식은 사라졌다.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표준화에서 우위를 차지한 회사는 시장을 독점하기가 쉬워진다. 선두 기업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튼튼하게 되고, 후발 기업은 선두 기업을 따라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진다. 표준을 지배하는 기업은 추격 기업의 표준 사용을 제한하거나, 또는 과다한 특허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앞서가는 기업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게 되고 후발 기업은 적정 수준의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표준화는 작업의 단순화로 이어져서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수익 배분에서 노동의 몫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표준화 방향

세계화로 인해 표준은 한 국가를 넘어 국제사회로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동종산업에서 유관 산업으로 그 범위가 한층 확대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표준을 놓고 벌이는 기업간 다툼은 경쟁을 넘어 전쟁을 방불케 한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5G 통신 기술을 두고 전 세계 통신 업체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 5G 기술은 자율주행차, VR/AR, AI 등과 관련되어 산업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다. 특정 기업의 기술이 국제 표준으로 선정될 경우 특허와 사용료를 받게 되고, 장비 공급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표준은 분명 필요하지만, 부작용도 크다. 부작용은 원래의 목적을 놓쳐서 본질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 나타난다. 표준은 공공의 이익 반영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표준이 특정 기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부정적인 측면이 나타나게 된다. 표준의 독점이 아니라 표준의 자유로운 공유를 통해 상생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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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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